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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확률의 경계에서—10년 전 바이오 투자보고서를 넘어서

purpureaworld 2025. 6. 9. 16:31

바이오 산업의 실패에서 배우는 예측의 한계

기술 산업에 몸담은 이들에게 있어 바이오 산업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기술이 우수하면 시장에서 성공한다는 공식이 어느 정도 통하는 IT, 반도체, 클라우드 분야와 달리, 바이오 산업은 너무나 많은 ‘예외’를 품고 있다. 지난 10년간 수백 건의 바이오 투자보고서를 분석해보면 한 가지 공통된 흐름이 있다. 바로 ‘기대는 넘치되, 실현은 드물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바이오 기업들은 1상, 2상 임상시험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도, 3상에서 무너진다. 일부는 규제기관의 기준을 넘지 못하고, 어떤 기업은 시장 진입에 성공하더라도 수익 모델을 만들지 못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명’과 ‘확률’이라는 복잡한 변수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바이오 산업이 왜 투자 예측이 어려운지를 넘어, 우리가 이러한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고찰하고자한다.

생명과 확률의 경계에서의 바이오산업


1. 기술은 충분했지만, 시장은 응답하지 않았다: 바이오 산업의 한계

기술적으로 봤을 때 바이오 산업은 엄청난 진보를 이뤘다. CRISPR 유전자 편집 기술은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조작할 수 있는 혁신을 열었고, mRNA 백신은 감염병 대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다.

예를 들어, 유전자 치료제의 경우 치료 대상이 매우 좁은 환자군에 한정되어 있고, 단일 치료 비용이 수십만 달러를 넘어선다. 이는 기존 보험체계나 헬스케어 시장의 상업적 구조와 맞지 않는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이를 받아들일 시장과 제도가 준비되지 않으면 상업화는 요원하다.

 

핵심 인사이트

  • 기술적 진보만으로는 시장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 바이오 산업은 기술 외에도 규제, 보험, 윤리 등 수많은 비기술적 장벽이 있다.
  • '혁신'이 반드시 '이익'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2. 바이오 투자 보고서의 함정: 확신을 과잉해석한 패턴

2014년의 바이오 투자 보고서를 보면, 한결같이 유망 기술에 대해 높은 기대를 드러낸다. "향후 수년 내 상업화 가능성", "대상 질환 시장의 폭발적 성장" 등의 표현은 익숙하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현실화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임상 3상'이라는 벽이다. 이 단계에서의 실패 확률은 평균 50%에 이른다. 이 과정은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수천 명의 환자, 복잡한 통계 분석, 다양한 변수 조정을 요구하며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하나의 실패가 그간의 모든 투자와 기술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또한 FDA 승인과 같은 규제기관의 판단은 기술적 판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고려가 개입되기도 하고, 장기 데이터 부족으로 인해 승인 자체가 수년씩 지연될 수 있다. 이는 바이오 산업이 기술보다 '확률'과 '정책'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영역임을 의미한다.

 

핵심 인사이트

  • 바이오 투자 예측은 기술 자체보다 임상 성공률과 승인 확률을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 장밋빛 보고서는 종종 불확실성을 제거한 '낙관의 산물'이다.
  • 투자 판단은 기술만으로 하기엔 부족하다. 확률, 규제, 정책까지 포함한 다면적 접근이 필요하다.

3. 다음 예측을 위한 교훈: 기술과 시장, 규제의 삼각관계 이해

이제 우리는 다음 질문을 던질 차례다. 바이오 산업의 불확실성에서 배운 교훈을 어떻게 다른 기술 산업에 적용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술 변화가 점점 빨라지는 지금, ‘예측’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AI 생태계 이후로 이어지는 기술 흐름은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플랫폼 주권’과 ‘디지털 생태계 지배력’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 구글과 안트로픽, 메타와 라마 프로젝트 간의 경쟁은 기술 자체보다 API 접근성, 생태계 개방성, 파트너십 구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즉, 앞으로의 경쟁은 기술력이 아닌 **‘누가 더 많은 개발자와 파트너를 유치할 수 있는가’, ‘누가 플랫폼 위에서의 표준을 선점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바이오 산업에서 기술만으로는 시장을 얻을 수 없었던 것과 매우 유사한 구조다.

 

핵심 인사이트

  • 기술 예측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이 적용되는 생태계와 구조다.
  • 플랫폼의 시대에는 개별 기술보다 이를 통합하는 방식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 바이오 산업의 실패 경험은 AI 이후 시대의 ‘디지털 주권 경쟁’을 읽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기술은 도구일 뿐, 방향은 사람이 만든다

바이오 산업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사람, 제도, 시간이라는 현실의 장벽을 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그 교훈은 지금 AI와 디지털 플랫폼 경쟁이 벌어지는 시대에도 유효하다.

예측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예측이 어떤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무엇을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바이오 산업의 불확실성을 겪은 투자자들이 결국 배워야 할 것은 '기술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가 아니라, '기술이 어떤 맥락에서 유효해지는가'라는 구조적 질문이다.